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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5 성경방자료 생존에서 영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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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다애교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402회   작성일Date 15-07-05 13:57

    본문

    생존에서 영생으로

     

    11:19-21

     

    이수정 마가복음출판 130주년 기념 국제 학술 심포지엄: 이수정의 성경번역과 선교활동 (2015630일 동경재일한국 YMCA)

    아시아언어문화연구원(ARILAC)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주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주관으로 열렸다. 아릴락 10주년 기념행사.

     

    이수정의 공헌 개요

    이수정은 임오군란(1882.7) 때에 군란의 중요목표가 되었던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종4품 선략장군직을 하사받았고, 군란으로 야기된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송될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도일하게 되었다. 그는 1882919일 제물포를 떠나 929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의 도일 목적은 일본의 개화된 문물, 특히 농업과 볍률, 우편 및 조운시설(漕運施設)을 견문하는 것이었으나, 그에 앞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와 농정신편을 쓴 친구 안종수로부터 소개받은 일본의 기독교인 농학자 츠다 센(津田 仙)을 만나는 것도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이만열, 이수정의 성경번역과 한국교회사의 의미 중)

     

    1884년 봄에 완역된 마가복음 한글판은 18848월에 인쇄를 추진하여 9월에는 활판이 완성되었으나 다른 업무에 밀려 인쇄가 연기되었다가 18852월에 요코하마에서 간행되었다. 이렇게 출판이 늦어지게 된 것은 한한성경 완성과 로스본의 결과 확인 및 무엇보다 한글성경에 대한 요구가 급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84년 미국의 각 교단에서 한국 선교사를 임명하고 파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쇄를 서두르게 되었다. 즉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가 18851월에, 2월에는 아펜젤러 등이 일본에 도착함에 따라 18852월에 한글본 성경의 인쇄를 서루르게 되었다. 이렇게 인쇄된 마가복음은 재일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배포되었고, 아펜젤러, 언더우드와 그 후에 내한하는 선교사들의 손에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피선교국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들어갔다는 것은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회자되는데, 그 때 마다 거론되는 성경이 마가복음이었다(이만열)

     

    이수정은 일본에 그 당시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새로운 문물을 통해 조선의 백성들이 보다 잘 살도록 하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조선 백성들의 생존문제때문에 일본에 왔습니다. 그랬던 그가 일본에 와서 복음을 듣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유학생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주도하는 등 전혀 다른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즉 영생에 관계된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과 섭리였습니다. 인간의 생존문제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영생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셔서 인간의 생존문제를 위해 일하도록 하시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인간의 영생문제를 위해 일하도록 하십니다. 이수정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백성의 생존과 관련된 새로운 문물을 배워서 조선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조선 백성들의 영생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부르셔서 쓰셨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교회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11:19-2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설립 배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유명한 안디옥 교회의 소위 창립교인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핍박이 일어나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으로 도망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안디옥에 갔으나 주님은 그들을 영생을 위한 일꾼들로 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수정도 일본에 생존문제 때문에 왔으나, 영생의 일꾼으로 쓰셨습니다. 그는 비록 45세를 일기로 아까운 생을 마쳤지만,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아니 그가 한국사람들의 영생에 끼친 영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2. 그의 신앙고백

    그의 신앙고백이 七一雜報 821(1883525일자) 에 실렸다. 그는 요한복음 14:10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애 안에 계신 것이라는 성서본문을 기반으로 (511일에) 고백을 썼다고 한다. 세례를 4월말에 받았으니 받자마자 쓴 고백이다!

     

     

     

    그는 이승훈의 조카 뻘 되는 사람이다. 신앙의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七一雜報 822(188361일 자)에는 이수정이 진술한 카톨릭 박해의 역사가 나온다. 이 내용을 보면 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사전에 나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신자의 살해(朝鮮信者殺害)/ 얼마전 도쿄에서 세례를 받은 이수정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최근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차차 늘어나니 포악한 대원군은 하나하나 이들을 살해하자고 하여 탐색을 시켜 국중(國中)을 뒤져 한꺼번에 남녀 합하여 180명을 붙잡아 들였다. 대원군은 이들을 한데 묶어서 형장에 나란히 앉혀놓고 그 목을 잡고 한 명씩 물어 보니, ‘, 지금부터 야소(耶蘇)를 믿는 것을 그만 하겠느냐? 그만 두겠다면 용서하겠다. 하지만,

    만일 그만두지 않는다면 당장 여기서 형을 집행할 것이다라고 말하니 앉아 있는 자들이 대답하기를 얼마나 큰 엄명(嚴命)이라 할지라도 영혼과는 바꿀 수 없으니 어명에 따를 수 없나이다.‘라고 하여 그 순간 목은 바로 땅에 떨어졌다. 그 다음 사람에게도 그렇게 물어보니 마찬가지로 어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목이 땅에 떨어졌다. 세 번째는 여덟 살밖에 안 되는 아이였는데, 이 아이는 눈 앞에서 부모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관헌(役人)은 그 아이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죽임을 당했으니 비록 이 가르침을 안 믿는다 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그 결단이 확고한 것을 보니 견물인(見物人: 구경꾼) 중에 신앙을 갖게 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180명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나, 신자는 오히려 점점 증가하였다더라.

     

    3. 그의한국선교에의 공헌- 한국의 마케도니아 인

    이승훈은 미국교회에 한국선교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것이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1884 에 게재되었는데 한국 선교사 유치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자매에게 인사드립니다... 복음 전파의 시대에 내 조국은 아직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세상의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의 성공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가 선교사를 보낼까 염려됩니다... 여러분들이 제 말을 경청하고 제 요청을 허락하신다면 더 없이 기쁠 것입니다. (서정민)

     

    이 요청에 응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1885년에 일본에 와서 이수정을 만나서 한국선교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지니고 내한했다는 것은 정설이다(서정민)

     

    한편, 이수정은 감리회의 매클레이(R. S. Maclay, 1824-1907) 선교사와도 교분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매클레이는 일찍 중국서교사로 크게 활동하였고, 이수정 활동 시기에는 일본의 감리회 선교 책임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수정과의 협력관계가 지속되던 18846월 한국을 방문, 고종을 알현하였고, 물론 그것이 교육과 의료분야에 한정된 것이지만, 프로테스탄트의 한국선교 착수 윤허를 받기에 이르렀다.(서정민)

     

    4. 우치무라 간조와의 조우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저작전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參席者 중에는 한 사람의 韓國人이 있었는데 그는 이 隱遁國國民代表하는 名門의 사람이로 一週日前에 세례를 받고 自己 나라 衣服恒常 着用하는 氣品堂堂한 자로서 우리 중에 參加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祈禱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하는 소리 밖에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도는 無限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出席하고 있다는 事實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場所光景을 한층 五殉節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 大親睦會復興完全한 펜테코스트(Pentecost)하게 함에는 現實이 불같은 必要하지만(2:3), 우리는 그것을 想像力으로 補充하였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무엇인가 奇蹟的이요 놀랄만한 事實이 일어나고 있따는 것을 온 會衆이 다 같이 感得하였다. 우리 會衆一同太陽이 머리위에 비치고 있지 않은가 하기 까지 神奇하게 여겼다. (내촌감삼신앙저작전집, 2권 중)(서정민, 이수정과 일본기독교와의 관계 중)

     

    참고)그의 사망설은 3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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